우리는 왜 게임을 두려워하는가: 중독과 몰입 사이에서
게임을 두려워하게 된 이유
저를 비롯한 많은 게이머들은 게임이 주는 즐거움과 매력을 알고 있지만, 아직도 꽤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그저 사람을 홀려 폐인으로 만드는 중독 물질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녀가 모니터 앞에 앉아서 게임을 할 때, “저 아이가 현실을 잊고 폐인이 된 건 아닐까?” 하는 공포를 느끼는 부모가 많습니다.
이러한 공포는 WHO가 ICD-11에 ‘게임이용장애(Gaming Disorder)’를 등재하며 질병 코드를 부여했을 때, 의학적 권위를 등에 업고 공포에 더 힘을 실어주게 되었습니다. 이후 국제 정신의학계와 각국 정부는 이를 계기로 공중보건 및 규제 논의가 확대되었고, 한국 사회 역시 셧다운제와 같은 제도 통해 게임을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WHO조차도 게임장애를 정의할 때, 단순히 게임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12개월 이상 지속적인 통제 상실과 일상생활의 심각한 기능 손상”을 핵심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즉, 열정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행위와 병리적인 중독은 엄연히 다르다는 뜻입니다.
일부 담론에서는 게임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강렬한 집중 상태를 ‘중독(Addiction)’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심리학의 언어로는 그것을 ‘몰입(Flow)’이라 부릅니다. 칙센트미하이의 정의에 따르면, 몰입은 “행동과 의식이 하나가 되고, 통제감이 극대화되며, 활동 그 자체가 보상이 되는 상태”입니다. 국내 KCI 등재 연구를 보면, 게임 사용을 곧바로 중독으로 해석하는 시각은 단순화된 접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해당 연구에서는 플로우 경험이 게임형과 정보검색형 사용 사이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았고, 충동성 역시 사용유형보다 중독 성향과 측정 방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이는 게임이라는 매체 자체만으로 몰입이나 중독을 설명하려는 접근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몰입과 중독은 모두 ‘깊이 빠져 있는 상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두 경험을 동일한 선상에서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게임은 ‘보상 감옥(Skinner Box)’이 아니라 ‘학습의 장’
게임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흔히 행동주의 심리학의 ‘스키너 박스(Skinner Box)’ 모델을 인용합니다. 레버를 누르면 먹이가 나오는 상자처럼, 게임도 아이템과 레벨업이라는 보상으로 인간을 조건화한다는 주장입니다. 확률형 아이템처럼 일부 게임 요소가 이러한 구조를 차용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게임이라는 매체 전체를 설명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게임은 단일한 자극을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장치라기보다, 플레이어가 규칙을 이해하고 상황에 적응하며 선택을 쌓아 가는 경험에 가깝습니다. 게임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단순히 보상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예측하고, 그 예측이 어긋났을 때 방식을 바꾸며, 점점 세계의 규칙에 익숙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보상 그 자체보다, “내가 이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감각입니다.
따라서 게임 플레이 과정에서 작동하는 도파민 반응은 흔히 상정되는 ‘마약적 쾌락’과는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그것은 즉각적인 만족을 주기 위한 신호라기보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선택과 예측을 조정하도록 돕는 피드백에 가깝습니다. 게임 속 반복은 중독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이해와 숙련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이런 점에서 게임은 마약과 동일한 자극 물질이 아니라, 놀이·영화·스포츠처럼 규칙과 맥락 속에서 경험을 만들어 내는 미디어 콘텐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복은 ‘소비’가 아닌 ‘체험의 내면화’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게임을 반복할까요? 이 질문은 게임을 한 번이라도 깊게 해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할로우 나이트』 같은 게임을 떠올려 보면, 처음 플레이할 때 플레이어는 계속해서 죽습니다. 적의 공격은 빠르고, 맵은 복잡하며,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복할수록 상황은 달라집니다. 적의 움직임에 리듬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맵의 구조가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이때 플레이어가 느끼는 것은 ‘보상을 받았다’는 감각이 아니라 ‘이제 이해했다’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이때 게임이 더 쉬워진 것이기보다는, 플레이어의 감각과 판단이 그 세계에 맞게 조율된 것에 가깝습니다. 패턴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게임들은 이 조율의 과정을 더욱 길고 깊게 만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몇 번의 실패에도 게임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더 몰입하게 됩니다.
반대로 『동물의 숲』 같은 이른바 ‘힐링 게임’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반복이 이루어집니다.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실력을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야 할 일도, 잘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같은 마을을 거닐고, 비슷한 하루를 반복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반복 속에서 플레이어는 세계에 익숙해지고, 게임은 점점 ‘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스토리 중심의 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나 『산나비』처럼 이야기에 초점을 둔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정답을 찾기보다 게임이 만들어낸 세계관을 관찰하며 점점 그 세계관의 일부가 된 기분을 경험합니다.
게임에서의 반복 플레이는 단순히 다른 결말을 확인하기 위한 '소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 세계에 동화되고, 그 안에서 느꼈던 감각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체험의 내면화'에 가깝습니다. 이때 게임은 시간을 소비하는 대상이 아니라, 경험을 다시 불러오는 장치가 됩니다.
게임은 소비재가 아니라 ‘경험의 틀’
게임을 단순히 시간을 빼앗는 소비재로만 바라보는 시각은 게임이 실제로 제공하는 경험의 성격을 놓치기 쉽습니다. 게임은 누군가를 붙잡아 두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작자가 설계한 규칙 안에서 플레이어가 스스로 익숙해지고, 이해하고, 선택하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게임은 중독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학습의 장이 되기도 하고, 휴식의 공간이 되기도 하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의 매체가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논의의 초점은 “게임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보다는, “이 경험이 어떤 감각과 상태를 만들어 내는가”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게임은 병리로만 규정하기에는 무궁무진 경험을 담고 있는 매체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잔잔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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